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정릉 도굴사건 (문단 편집) == 이 쯤에서 덮어두자 == 결국 조선 국왕 [[선조(조선)|선조]]는 이쯤에서 덮으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었다. 처음엔 둘이 제 목숨을 건지려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게 아닌가 해서 혹독하게 [[고문]]을 가해 보았지만 이들은 끝까지 버티며 자신들이 범인이 아니라고 버텼고 범인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보고만 올라왔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일본 측에다 왜 가짜를 보냈냐고 따진다고 해도 그들이 진범을 잡을 수 있을 가능성도 희박했다.[* 사실 정말로 진짜 범인들은 못 잡아서 어쩔 수 없이 가짜라도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선정릉을 도굴한 사람들은 거의 높은 확률로 병사 등 전투에 참여할 만한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무덤이 도굴되었을 만한 시기는 당연히 한양이 점령당한 임진왜란 초반일 텐데 임진왜란은 7년간 이어진 전쟁이다. 물론 그 사이에 강화를 위해 오랜 기간동안 전쟁을 잠시 멈추기도 했지만 그 기간이라고 전투가 없던 것도 아니고 또 임진왜란에서 살아남았다고 해도 [[세키가하라 전투]]가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난 사상자가 무려 3~4만 명이나 되는데 그럼 여기서 죽었을 수 있다. 즉, 단순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잡으려고 해도 이미 죽거나 행방을 알 수 없어서 못 잡았지만 그렇다고 뭐라도 보내야 할 판이니 가짜라도 보냈다고 하면 말이 아주 안 되는 건 아니다.] 물론 조정 내에서는 선릉과 정릉을 도굴한 진범을 내놓을 때까지 절대 화의를 맺어선 안 된다는 여론도 만만찮았으나 결국 이대로 질질 끌면 쓸데없는 [[소모전]]이 될 뿐이라는 여론이 더 우세해 이 쯤에서 덮기로 결정했다. 이후에 논의된 문제는 그 가짜 범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로 옮겨갔다. [[이덕형]]은 이 가짜 범인들을 다소 동정했는지[* 그럴 만도 한 것이 진범이 아니라 일본 측에서 대충 잡아 보낸 것이 훤히 티가 나는 상황이었고, 저들로서는 아무리 사형수일지언정 본인들이 저지른 적도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죽게 될 판이니 아무리 조선이 일본에게 이를 갈고 있다고 해도 이건 좀 아니다 싶을 정도로 동정할 여지가 충분했다.] [[김해시|김해]]나 [[양산시|양산]]으로 귀양을 보내서 살게 하자는 방안을 건의했지만 다른 대신들은 비록 저들이 가짜이긴 해도 그냥 살려주면 입을 놀리다가 벌어질 일이 두려웠는지 처형하자고 했다. 그리고 이들이 완전히 무고한 것도 아니고 어찌됐건 대마도에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였기 때문에 결국 그 가짜 범인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결국 1606년 음력 12월 20일에 둘 다 [[참수형]]이 집행되었다. 조선 조정에서 이 두 사람을 처형하고 불문에 부치면서 결국 진범은 붙잡지도 못했고 진짜 왕과 왕비의 시신은 찾지도 못한 채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한편 일본 측에서는 대마도에서 날조했다는 사실을 30년 뒤인 1620~30년 경에야 알게 되는데, 피해국인 조선에서 이미 덮어버린 사안인 데다 조선이 뒤끝을 부려서 "니들 저번에 우리한테 가짜를 진범이라고 보내놓고 사기 쳤지?"라고 걸고 넘어지면 일본 입장에서 분명히 난처해지는 것도 사실인지라 결국 일본에서도 덮는 걸로 끝났다. [[분류:선정릉]][[분류:16세기 사건 사고]][[분류:강남구의 사건사고]][[분류:조선의 사건 사고]][[분류:일본의 사건 사고]][[분류:문화재 사건 사고]][[분류:조일관계]][[분류:한일관계]][[분류:대한민국의 영구 미제사건]][[분류:누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